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의 흔적과 인생 2막을 시작하면서...

황새2 2018. 10. 25. 05:37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어야할 것들이 있지요.

가장 확실한 것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고, 다음이 시기마다 변해야한다는 것이지요.


처음은 유년의 시기이지요

든든한 배경이자 만능 해결사인 어머님.

울기만 하면, 또 몇일 지나면 모든 것이 무조건 적으로 해결 되지요.

뒤돌아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기이고 지금도 저를 지탱하게 하는 원천이 되지요.


7남매의 막내로 자란 저는 어릴적 기억이 그렇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주 어린아이 일때는 집 옆에 큰? 강이 있었고 집안에 큰 무화과 나무가 있었던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코 밑에 난 큰 상처가 있는데...

누룽지 얻어 먹으려고 미닫이 문을 잡고 가마솥을 보고 있다가 누군가가 문을 여는 통에 솥으로 떨어져 생긴 상처라고 합니다.  

지금도 그 상처가 뚜렷이 남아 있으며, 아주 어린 시절의 흔적이지요.


그리고 간난아이 때부터젖이 나오지 않아서 암죽(일종의 이유식)으로 자라 한 동안 배만 불록 뛰어나온 배불뚝기 였지요.

그래서 학창시절 많은 일가친척이 저를 보면 너가 그놈이냐 하시면서 측은해 하시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독립? 했지요.

자식이 너무 많으니, 그것도 둘째이신 누님 한분만 빼면 모두 사내들이니...

저는 치여서 안중에 없고,  아니 나만을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서 할머니 집으로 들어갔지요.

할머니 집은 본집과는 10여리 떨어진 조금 더 시골이며, 물레방아가 있는 방앗간이지요.

그리고 저가 4학년일 때 쯤 물레방아가 원동기로 바뀐 것 같습니다. 


사실 저가 입학한 국민학교가 시내에 있었는데... 새로운 학교가 시골쪽에 생기면서 많은 학생이 강제로 전학을 갔고,

오히려 할아버지 집이 더 가까운 거리가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공부랑은 담을 쌓고 책가방(저학년 때는 보자기, 고학년 때에 비로서 가방) 던져두고 마냥 놀기만 했던 것 같고,

지금 기억으로도 집옆 강에서 4계절 물고기 잡고, 여름에는 수영하면서 물놀이 하고, 가을에는 잠자리 잡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와 깡통 불놀이 하고 등 등...

그리고 전쟁 직후이니 고아들이 참 많았고, 어린 시절에는 먹거리도 많이 빼앗겼던 것 같습니다.



다음은 학창시절로

그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보고 성적순으로 입학을 하는 시절이였고, 그러니 좋은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나름 공부를 잘 해야하는데...

입학시험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그 초조함이란.... 지금도 기억이 또렸합니다.

(이 초조함과 함께 그 당시 기억에 남은 노래가 정훈희씨의 '안개'인데요. 자료를 찾아보니 1967년 음반이네요. 나이는 저보다 1살 많구요.

그러니 아무리 계산을 해도 고등학교 입시 때 였나봅니다. 기억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네요.)


저 위로 두분 형님이 다니고 있는데, 저만 못 들어가면 집안에서 완전 놀림감이 되니...

실은 매학기말에는 성을 바꾸라고 하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양가로('가' 씨가 없었기에 망정이지요. 저 기억도 예능 분야는 전부 하위권이였으니까요. 특히 음악실기) 


하지만 의기양양하게 입학을 했고, 어였한 중학생이 되었지요.

지금도 그러하지만, 중고가 같이 있는 학교이고, 또 당시만 해도 시절이 혼란해서 학내에 패거리가 있어서 교실에서도 집단 싸움이 생기는 경우가 많고,

고아도 일부 있으니, 맞지 않으려면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도 알게되고...

그래서 단짝으로 뭉쳐 다니는 삼총사가 만들어 졌지요.

이름은 "조귀성, 김종호"이며,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름이고 다시금 보고 싶네요.


귀성이는 고등학교를 기술계로 들어가면서 시골을 떠나 가족 전부가 부산으로 갔고...

나중에 안 것이지만, 모 방송국 기술직에 들어가서 고위간부까지 한 것이고.

종호는 나이 많으신 부모님의 가업(농사)을 잇기 위해서 시골집으로 그리고 결혼도 아주 빨리하면서 생활방식이 다르니 서로 멀어져 버렸네요.

(그 당시는 교통도 좋지 않았고 전화도 귀한 시절이라서 한번 멀어지면 영원히 해어지는 시대였지요)


중고등학교는 그런대로 공부도 하면서 그사이 홀로되신 할머니와 함께 했지요.

이유는 공부방이 필요했고, 학교와 가까운 곳에 살기 위해서이지요.

그러니 저의 성장시절은 거의 대부분을 나이 많으신 할머니와 함께한 것이며,

지금 돌아보면 저가 나이들어감에 대한 대비를 남들 보다는 먼저한 이유가 아니였나봅니다.

(할머님은 나이드셔서 혼자서 독학을 해 한글을 익히시고 성당에 다니시면서 매일 성경책을 읽으셨습니다.

그 당시는 당연한 것으로 보였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참 똑똑한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대학은 참 어려운 선택이였습니다.

아니 그 당시는 대학을 간다는 것은 혜택이며 특권이였지요.

아마 막내가 아니였으면 갈 수 없는 환경이였겠지요.


비록 공부를 잘해도 보내준다는 확신이 없으니, 가장 저렴하게 대학을 다녀야 하고, 그래서 처음 생각한 곳이 공사(공군사관학교),

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 였지요. 하지만 만만한 곳이 아니지요. 원서를 내려면 전교에서 5등 안에 들어야했고...

그래서 나름 공부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습니다.

아마 고2로 기억되는데...

아버님이 아무 잘못없이 억울한 일을 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니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대학을 법대로 바꾸었습니다.

이과를 공부하고 있던 저가 갑자기 문과를 택할 만큼 이 사건은 저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준비 안된 법대(부산대: 일가친척이 있어서 선택) 도전은 조금 무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2차 면접까지는 보았습니다.

면접 보시는 교수님이 너는 이과 과목은 아주 잘 보았는데, 문과 과목은 좋지 않다. 전공을 바꾸는 것이 어떠하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연고'가 아니면 사립은 전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고 나름 기억됩니다.

하지만 사립은 다닐 형편이 안됩니다.

이미 부친은 경제권을 거의 상실한 상태이고, 큰 작은 두 형님들에게 손을 별려야 하는데 결혼한 상태이니 만만한 일이 아니지요.

(그 당시 바로 위에 2분 형님이 어렵게 대학을 다니고 있었음. 한분은 서울교육대, 한분은 서울대 공대)

이렇게 부모님과 상의 없이 도전한 법대는 다행스럽게? 낙방을 하고...


다음 단계는 전액국비이거나 학교 다니면서 학생 과외 아르바이트가 가능한 수준의 대학을 목표로  다시 시작했습니다.

즉 재수를 한 것이지요.

이때는 다행이 서울에 형님이 계시니, 더부살이가 가능하다고 서울로 진출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런 생활 근거가 없는 돈없는 서울 생활은 외로움과 고난의 연속이였지요.


재수 학원은 종로의 종로학원에서 시작하여 대성학원 서울대반에서 보냈으며, 서울생활은 나름 많은 것을 변화시켜주었지요.

숙식은 청진동 삼청동 하숙집(1평도 안되는 작은 방이 여러개인 가정집)에서  하면서 지금까지의 나는 우물안 개구리였음을 실감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러니 1년의 재수는 저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해준 소중한 기회였고, 저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서울생활은 공부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너무 답답하면 주변을 쏘다니는 것으로 1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시간이 된 것이지요. 성적으로는 농대는 가능. 하지만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공대는 무리.

결국 전공을 고집할 경우 그런대로 인기가 좋고 장학금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서울의 S대학을 선택했습니다.

(S대 전자과는 저가 입학할 당시는 연고보다 더 성적이 좋았습니다. 또 장학금도 많았구요.)


30명 정원에 어떻게 입학은 했으나, 대학생활의 낭만은 거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려운 시기이니 겨우겨우 한학기를 버티면서 보냈지요.

그래도 데모도 하고 MT도 다니기는 했습니다. 가끔은 양희은씨도 보고, 감옥에 있는 대통령도 보고...

하지만 보통은 모든 어울림이 돈이 있어야 하니 학우들과 어울림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요.

나머지 시간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보냈지요. 그 당시 S대학은 가장 많이 공부시키고 또 가장 공부하기 좋은 분위기의 대학이였으니까요.


이렇게 부족한 것을 채우는 기회, 그리고 이 기회가 아니면 영원히 뒤처진다는 각오.

그리고 공부하는 것이 재미가 있어 열심히 했으며, 등록금의 절반 이상은 장학금으로 충당하면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1학년 때는 송파에서(이유는 왜 그랬는가 기억이 명확하지 않으나, 학교와는 아주 먼 거리였지요.) 자취를 했고, 2학년 때는 노고산동에서 하숙,

3학년 때는 잠실 형님집에서... 다시 4학년때는 학교 주변에서 자취.

그러니 주말에 시간이 나면 혼자서 천호대교 아래 한강에서 낚시를 하고, 잠실 개발로 석촌호가 생겨서는 그곳에서 낚시를 하면서 보냈지요.

그러다가 3학년때 밤낚시를 하다가 카바이트통이 폭발을 해서 손에 30여 바늘을 꾸미는 큰 상처를 입고...

병신이 될 수 도 있었지만, 천만 다행으로 무사히 넘겼지요. 지금도 그 흔적이 왼손에 크게 남아 있으며, 이런 기억 때문에 잠실은 저에게는 남다른 장소이지요.    

 

당시 서울에서도 서울 출신이 아니면 학생 과외 아르바이트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아르바이트도 소개와 아름으로 진행되니 시골 출신은 만만한 일이 아니였지요.  

그리고 시골은 아직 과외라는 개념이 없었구요.


이렇게 4년을 보내면서 휴학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휴학을 하는 순간 복학은 어려워질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다행히 그 사이 형님이 군입대로 휴학을 해서 겨우겨우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요.

또 빨리 돈을 벌고 자립을 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가지 않아야 했지요. 그러니 저학년부터 공부의 목표점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우선 목표는 병역특례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국방과학연구소(ADD) 입사.

3학년때는 목표가 커져서 공짜로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는 한국과학원(KAIST) 입학. 

4학년이 되면서 먼저 ADD가 결정되었고,  서울대가 아니면 거의 들어갈 수가 없는 KAIST까지 합격을 한 것이지요.

이렇게 힘들지만, 전원 기숙사 생활에 첨단 장비를 가지고 배우는 의미 있는 시간들을 홍능에서 보냈고...

졸업과 동시에 정부의 방침에 따라서 반 강제로 의무적으로 지금의 직장에 내려온 것이지요. 

그것이 1979년이니 벌써 40년이 다되어갑니다.


당시 첫월급이 10만원(회사의 1/3 수준?) , 그 돈으로는 생활이 안되어 교수아파트 식당방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6년 정도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아내는 돈 없는 남편과 무일푼으로 결혼 하면서 살기 위해서 험한 일을 하면서 신혼을 보내고 청춘을 보낸 것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감당이 안되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었는데...

같은 처지의 좋은 동료 선배 후배들을 둔 덕이라고 보입니다.


이렇게 돈을 벌면서 배우는 소위 교육과 연구를 늦은 밤까지 아니 지금까지 40여년을 계속 했습니다.

그 덕에 남보다는 많은 산학과제를 했으며, 다양한 무기 국산화에도 일조를 했다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재태크도 하면서 집도 장만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는 안정된 생활로 들어갔으나, 기술 개발에 대한 저의 욕심은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서 2번의 창업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창업은 많은 경험을 쌓는 기회가 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마이너스.  

그래도 과학원 연구실 후배의 창업성공으로 어느 정도의 돈이 생겨서 큰 부담은 아니였지요.


이렇게 사업이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기술만으로는 돈 벌기가 힘들구나도 뼈져리게 느꼈고,

그러면서 나는 더는 직접적인 사업은 하지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이런 일년의 과정 사이 바뀐 생각은 모든 사장님들이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긍정적인 생각 등.


그리고 15여년 전부터 언젠가는 다가올 퇴직 후 내가 할수 있는 일을 준비하고 만들어 왔습니다.

그중 하나가 시골집이고 또 하나가 가진 기술을 산업에 접목하는 일입니다.


시골집은 모친이 돌아가시고 홀로되신 부친을 저가 모셔야 했으며,

아니 저를 공부시킨다고 형님들과의 사이가 멀어져 나이들어 고향 시골(산청군 단성면)로 들어가신 후

그래도 차가 있고 거리상으로 가볼 수 있는 위치(? 왕복 4~5시간 거리)에 있는 저가 최소한 한달에 한번씩은 다녀왔지요.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 막내인 저와 매일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을 모시는 일을 시작한 것이고,

(그 당시 부모님은 자식과는 같이 살지 않겠다고 고향으로 들어가신 것이며,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인하여 저가 나이듬에 대한 대비를 더 빨리 하게 된 것이지요)

그때가 80년대 후반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모친이 돌아가시니 이제는 1주일에 한번씩 음식을 해서 날라야 했습니다.

그런 일을 약 3년쯤 하니, 계속되는 장거리 운전으로 허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또 나이가 더 드시면 매일 들락거려야 하는데 불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대구에서 같이 사시기를 않겠다고 하니...

(저도 그럴 것 같습니다. 아니 그래야 모두가 편합니다.)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지요.


그래서 직장에서 반경 40Km 이내이고, 시간은 승용차로 1시간 이내, 눈이 와도 다닐 수 있는 곳. 조금 따뜻한 곳. 

토일 절대로 길이 막히지 않은 한적한 곳을 찾았지요. 또 평지가 적은 곳이 향후 개발이 안되어 앞으로도 계속 깨끗할 수 있다는...

그 당시의 관점과는 다른 투자?이며, 지금도 그 상태가 이어지고 있으니, 저는 성공?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1996년에 땅을 사고, 바로 1997년에 집을 짖고, 그곳에서 10여년 부친이 사시다가 가셨고, 지금은 그 뒤를 저가 잇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식이 나이들어서도 살았으면 하는 것이구요.

또 이렇게 하려면 돈이 되지 않아야 하지요. 돈이 되면 돈의 유혹으로 마지막 기댈 수 있는 터전 마져도 사라져 버릴 수 있으며,

그러한 사례를 주변에서 너무도 많이 봐왔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저 생각이 이러니, 모양을 떠나서 집은 튼튼하게, 앞으로 50년은 손대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고...

거동이 힘들어져도 지낼 수 있는 공간, 즉 모양 없는 시골집이 탄생한 것이지요. 

그렇게 올해로 만 20여년이 지났으며, 2년전에 지붕만 다시 동판으로 교체를 했습니다. 

 

이렇게 생긴 시골집은 경제적으로는 손해입니다. 분명 도시 주변보다는 값어치가 없는 투자였지요.

하지만 저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가 그 동안 나름 즐기면서 건강하게 살았다는 것이고.

다음이 그 당시는 IMF로 그 돈을 증권 등에 넣어 두었다면 지금은 한푼도 남어 있지 않았을 가능이 90% 이상이니...

가치를 떠나서 땅은 남아 있다는 것이고...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현재 더 많은 돈이 있다고 해도 지금 나이에 큰 돈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변해야할 시기 고비 마다 잘 적응해서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가 살아온 세상은 하루 하루가 다르다고 할만큼 너무도 많이 변했습니다.

경제적 기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고방식까지도 변했습니다.

그러니 시대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은 그냥 사라진다는 것도 너무나 많이 경험 했지요.

즉 앞으로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신을 해야하고... 나만이 할 수 일을 만들고 키워야 하지요.

바로 은퇴 후의 생활 설계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 동안 직장에 있으면서 대기업과 많은 일을 했지만, 저에게 남은 것은 없습니다.

대기업은 개발된 기술을 가져갈 뿐이니 과제가 끝나면 저와는 무관하지요. 

또 자기들 필요에 의해서만 일이 진행되니 다양한 일을 하지만 연속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기술개발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생산 판매까지 전부 해야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가 있지요.

또 중요한 것은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는 것입니다.(김우중 대우 회장님 말씀)

하지만 시장에 나가는 물건은 기능은 기본이고, 부가적인 것들이 더 중요하며...

이런 것들은 시간투자와 지속적인 관심이 중요하지요. 소위 잡일이 아주 많이 필요하며 연구와는 조금 동털어져 있지요.


그래서 2000년대초반부터는 대기업과의 관계는 중단하고 개발인력이 전무한 작은 업체를 지원하는 일을 시작했으며...

이런 일은 경제적으로는 손해보는 것도 있지만, 산업현장이라는 것을 몸으로 배우는 중요한 시간들이었지요.

그리고 그 동안 개발 생산된 10여 종류의 제품들이 작은 회사를 20여년 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구요.


이렇게 남들과는 달리 여러 일을 하면서 보낸 세월을 뒤로 하고,

2018년 8월31일자로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즉 당연하지만, 40여년 정들었던 곳을 떠난 것이지요.

 

그 사이 많은 분들의 정년퇴임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조금씩 고민해왔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변화를 주지 말자입니다. 즉 지금껏 살아왔던 길을 계속 가자는 것이고...

다만 그 동안 하고 싶었으나 시간 여유로 못했던 일을 추가 했으면 하는 것이 였지요.   


하지만, 저 삶의 흔적인 지금까지 모아온 전공 관련 책과 서류를 모두 버려 두고 방을 떠나야하고,

그리고 언제라도 갈볼 수는 있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문열고 들어갈 곳이 없어진다는 것.

즉 소속이 사라져 공동체로부터 내가 할 수 일이 한꺼번에 없어진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충격입니다.

나름 그 동안 대비를 해 왔으니, 외형적으로는 아니라고 무관심하지만... 지난 1달은 조금 방황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교수라는 직함은 지우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 갑니다.

(항상 말로는 직업이 3개(교수, 연구원, 농부)에서 하나 준 것이니, 아직은 완전한 백수는 아니라고 호탕하게 웃습니다.)

그리고 이제 공인이 아니니 조금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도 있으니 좋은 점도 있겠지요.


당분간 정리가 될 때까지는 월급은 없지만, 작은 기업의 연구소 소장(고문)이라는 직함으로 다시 인셍 2막을 시작합니다.

그 동안 간접적으로 도왔다면, 이제는 직접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하지만 돈을 받게되면 책임감을 가져야 하니, 스트레스가 될 수 있어서 몇달간만이라도 조금 쉬었다가 시작하려고 합니다.

또 저가 할 수 있을 때에 조금 더 안정된 회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더 나이들어서도 백수가 안됩니다.


사실 어찌보면 이 일은 배운 사람으로 돈을 떠나서 저가 그 동안 사회와 국가로 부터 받은 특혜를 조금이나마 돌려주는 일이며,

40여년의 긴 세월 동안 한가지 일에 온 열정을 쏟은 내 자신을 위로하고 남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이기도 하지요.

(시골집 담 넘어로 보이는 가을 풍경)


지금의 저를 보면, 남들은 어찌보면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버려두고 너무 힘들게 산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현재도 있을 수 없고 또 미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린시절 나이드신 분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무의식적으로 미래를 대비하고, 또 나이듬에 대해서도 미리 고민하지 않았나 합니다.

 

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얻은 결론은 조급해하지 말자. 살아가는데는 정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 길만이 정답으로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더 좋은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이고...

그러니 무엇인가 모르는 것을 찾으려고 방황할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이 정답이 되도록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생활신조가 되었지요.


퇴임을 하면, 억매임 없이 조금은 여유롭게 어디든지 떠나서 1달 살아보기를 하기로 생각해왔고 약속했는데...

아직도 전혀 실천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우선은 도움을 주는 회사에 급하게 마무리해야할 일이 있기도 하지만, 새로운 첫발을 내밀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시간이 지날 수록 몸이 안 따라와 줄 것이니...

올해 안에 무조건 나만의 삶을 다시 시작을 해볼 생각입니다.



(이제 부모님 뿐만 아니라, 몇년전에 큰형님, 이번 9월에 투병중이시던 3째 형님도 평안한 곳으로 떠나가셨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는 떠나야 할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 소원하는 바는 나이들어서 남들 힘들게 하지 않고 본인은 추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지요)

 

(눚은 가을 홀로 핀 도라지꽃)